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낭 포슈 (문단 편집) ==== 연합군 대원수 선임 ==== 1915, 1916년에 북부군을 지휘하고 있던 포슈는 별 성과도 없이 아르투아와 솜 지역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1917년 5월 15일, 육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연합군의 조언자 역할을 했으나 조언이 지휘는 아니었다. 한편 19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독일과의 협약으로 전쟁에 빠지면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서부전선에 무려 192개의 사단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장비로만 보자면 연합군은 비축한 물자에서 우위를 보였는데 항공기 4,500대, 포 18,500문, 전차 800대에 비해 독일군은 각각 항공기 3,760대, 포 16,200문, 박격포 7,360문, 전차 20대를 보유했을 뿐이었고 이런 전력차는 곧 참전하는 [[미군]]이 보충하면 더더욱 더 커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제대로 된 대포와 전차, 항공기를 생산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프랑스에게서 상당수를 받아서 쓰는 상황이라 미군의 참전으로 벌어지는 것은 병력수 정도이다.] 따라서 루덴도르프는 생캉탱 부근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작전명이름을 미카엘 작전이라고 붙였다. 최종적인 목표는 솜 강 전선을 바다 쪽으로 밀어버리고 영국군 전선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3월 21일 독일군은 대대적인 총공세를 단행했고 이때 독일군 사단은 [[염소(원소)|염소]] [[가스]]와 [[포스겐]] [[최루탄]]으로 안개가 가득 찬 새벽에 기습 포격을 가하고 전진했다. 공세가 시작된 3월 24일부터 3월 26일까지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분리되어 참호선 전체가 북서쪽으로 해협의 항구들을 향해 이동할 가능성이 커졌고 이것은 루덴도르프가 의도한 포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마른 전투의 전선 붕괴의 악몽이 재현되리라는 생각이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를 덮쳤고 [[필리프 페탱]]은 헤이그에게 증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이틀 후 아미앵 근처 둘랑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프랑스 대통령 푸엥카레가 의장을 맡았고 패탱, 헤이그, 포슈, 클레망소 그리고 영국 전쟁장관 밀너 등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헤이그는 제5 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자 바로 패탱은 제5 군이 붕괴되었음을 말했고 특히 제5 군을 지휘한 허버트 고프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 제5 군을 [[카포레토 전투]]의 [[이탈리아군]]에 비교하였다.[* 하지만 허버트 고프의 실책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한계의 범위에 속했는데 1918년 영국군은 사단의 병력을 12개 대대에서 9개 대대로 축소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됨에 따라 병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이에 결국 영국군은 편법을 쓰기로 하는데 일부 기병대는 보병으로 쓰기로 하고 145개의 대대를 해체하여 나머지 대대의 증원 부대로 쓰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전체 대대의 4분의 1이 원래 자기 부대를 떠나 다른 부대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했고 하필이면 그 대부분이 고프의 제5 군에 소속되었다. 두 번째로는 방어선이 미숙했다는 것이었다. 헤이그는 1917년에 많은 붕괴가 된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프랑스군이 책임지던 전선을 일부 넘겨받기로 했는데 그곳은 정확히 루덴도르프가 춘계 대공세를 하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결국 고프는 자신의 우익을 솜 강 너머 상태가 나쁘기로 유명한 프랑스군 참호 체계[* 참작의 여지가 있다. 1917년을 거치며 프랑스군의 참호선이 서서히 간소화되고 요새화와 거리가 멀어졌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참호전술이 '요새화 참호'가 아닌 '영역' 혹은 '공간'에 의지하여 적을 깊숙히 끌여들여 포병과 분리시켜 보병대만 박살내는 종심방어 전술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영국은 여전히 기존의 3중 요새화 참호 체계를 선호했으니 두 군대의 참호전 체계의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 로 확장시켜야 했고 동시에 한해 전에 힌덴부르크 선으로 더 나아간 후 옛 솜 강 전역 앞에서 영국군이 임시로 급조한 방어선을 보강해야 했지만 문제는 고트의 사단이 노동력이 너무 부족해 [[철조망]]은 군데 군데 설치되었으며 기관총 진지는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방어선 정비가 미완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페탱은 능력껏 지원했으며 이제는 아미앵의 방어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패탱의 이 발언 끝에 포슈는 격하게 발언했다. >'''"우리는 아미앵 앞에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이제 한 치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포슈의 이 발언으로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 간 뒤 헤이그가 포슈의 명령을 받게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처방은 모두를 만족시켰으며 지휘권의 독립성을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던 헤이그 역시 만족했다. 포슈의 권위는 4월 3일에 확장되어 "전략 작전의 지휘"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5월 8일 포슈는 결국 공식적인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바야흐로 독일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포슈의 의지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주도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그의 공세를 강화했다. 한편 포슈는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위해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절망적인 외침들을 묻어 둔 채 포슈는 부하 장병들에게 그들의 극한적인 인내심을 요구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빈약한 비축품을 절약했다. 그의 통찰력 있는 인내심은 결국 피카르디와 플랑드르에서 루덴도르프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그는 루덴도르프에 의해 해안까지 후퇴한 영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프랑스 전선에서 주저 없이 철수시켰다. 루덴도르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여 5월 27일 프랑스 전선을 돌파했고, 독일군은 마른 지역까지 그 전선이 퍼져 있었다. 6월 9일 우아즈 지역에 새로운 돌파구가 생겨났으나 포슈는 이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루덴도르프는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7월 15일 그는 샹파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으나 2일 후 그의 공격은 저지당했다. 그가 패배한 것이다. 이제 포슈의 의지력이 루덴도르프의 의지력보다 우세해졌으며 따라서 포슈가 일격을 가할 차례였다. 7월 18일과 8월 8일 2차례의 공격으로 포슈는 루덴도르프를 수세로 몰아갔다. 특히 2번째 공격을 루덴도르프는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8월 6일 프랑스군 원수로 진급한 포슈는 독일군뿐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강행하여 독일군 전선에 가차없는 타격을 주었다. 결국 독일 제국은 독일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제 독일은 르통트에서 1918년 11월 11일 포슈가 연합군의 이름으로 작성한 휴전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1월 26일 포슈는 메스로 돌아왔다. 영국과 폴란드의 명예원수 계급장을 받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최고전쟁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파일:external/lindamathieu.com/invalides14.jpg]] 1929년 3월 20일에 파리에서 생을 마쳤으며, 나폴레옹의 묘지가 있는 앵발리드 내부에 안장되었다. 나폴레옹 묘소를 찾아간다면, 포슈를 참배할 기회도 있다는 뜻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